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비아 페미니즘 (문단 편집) ===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 진보진영을 위하여 === 사실 이 단락의 내용이야말로 저자의 메시지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본서는 단순히 페미니즘 외부로부터의 비판서라기보다는, '''[[진보]]진영 전반의 동향'''에 대한 내부로부터의 비판서의 성격을 갖는다. 바꿔 말하자면, 페미니즘이 이슈가 되니까 뒤늦게 관심을 갖고 비판하기 시작한 게 아니라, 이미 진보진영에 대해서 일관되게 갖고 있던 기존의 문제의식을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징후' 와 연결했을 뿐인 것이다. 이처럼 저자가 기존에 사용하던 분석 틀이 이미 존재하므로, 그 솔루션도 구체적이게 되는 것. 아무튼 본서에 따르면, 상기된 페미니즘의 '한계점' 들은 그것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토양에서 자연히 나타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하의 내용은 본서의 1장의 내용을 편의상 뒤로 빼 놓은 것인데, 1장이 없었더라면 본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흔한 대증요법에 그쳤을 것이다. 저자는 현대 진보진영의 가장 큰 문제로서 '''[[정체성 정치]]에 지나치게 집착함'''을 들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을 때 미국 [[리버럴]]들은 충격에 빠져서 "왜 [[여성]]들은...", "왜 [[무슬림]]들은...", "왜 [[성 소수자]]들은..." 과 같은 다양한 정체성 정치 논리들을 끌어다가 설명하려 애썼다. 또한 국내 진보세력 역시, 지난날 [[민주노동당]]처럼 계급적 기반을 갖춘 세력은 소멸했으며, 모든 진보정당들이 계급적 기반 대신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저자는 진보정당이 계급을 버리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대중정당, 혹은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오타쿠]]화(化)된 정당" 의 길밖에는 없다고 하면서, 작금의 한국 진보정당들은 후자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정체성 정치에 골몰한 정치세력은 크게 보아 두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첫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우울증]]적일 정도의 애착을 갖게 되고, 그것이 공격받으면 방어적으로 반응한다.''' 이는 자신들을 공격하는 세력에 대해 공포심을 갖게 만들고, 그 결과 반동적으로 보수화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둘째, 정체성 정치는 '''현실의 사회문제의 복잡성을 환원하여, 그들 자신을 구조맹이자 맥락맹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들이 평소 목놓아 외치던 것과는 달리, "사회문제 전반을 특정 정체성의 문제에 결부시키는 순간, 개개인의 정체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회모순과 사회구조의 문제는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다"(p.84)는 것이다. 현실의 여러 사회문제는 개인의 인종, 종교, 성적 지향 등을 '가로지르며' 더 복잡한 다차원적 분석을 필요로 하는데, 정체성 정치는 그 모든 갈등과 문제들을 깔끔하게 하나의 정체성 여부로 끌고 가려 한다는 얘기다. 진보진영의 정체성 정치는 이처럼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호하려 애쓰게 되며, '''정체성을 보호하려는 노력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이 정당화된다.''' 이것은 극단적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마" 의 요구인데, 저자가 보기에는 성숙한 시민들의 사회문제 해결 솔루션이 아니라, 그저 유아적으로 퇴행하여 문화적 인정투쟁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진보언론에서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칼럼이 실렸을 때, 예전 같았으면 반론 칼럼을 싣거나 입장을 표명하거나 했겠지만, 현대에는 대개 "[[사과문|나 기분 나빠졌어, 사과해]]" 같은 반응이나, 잘해봐야 [[보이콧]] 같은 집단적 위력과시 중 하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PC운동은 다시 두 가지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첫째, 우리 편에 대한 '''막연한 도덕적 우월감을 갖게 하여,''' 남들에게는 존중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정작 남들을 존중하지는 않는 오만함을 보이게 만든다. 즉, 우리는 시시때때로 공격을 받고 있는 '가엾은 피해자' 들일 뿐이니, 우리가 어떤 말을 하든 그것은 "단말마의 절규" 가 되고,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은 "[[최후의 저항]]" 이 되지만, 너희 도덕적이지 못한 가해자들은 아무리 조심하려고 애를 써도 우리의 검열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정치적 올바름은 이를 어긴 사회적 강자들을 설득과 합의의 대상으로 보지 않기에, 결국 이들이 추구하는 진보나 개혁은 '''상대편의 공감대를 얻지 못하는 [[계몽주의]]적 성격을 드러낸다.''' 상대방이 황당해하면 그것 역시 피해자의 처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니, 결국 해 줄 말은 "감수성을 키우세요", "공부하세요" 밖에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5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선거에서 패배하기라도 하면 이 '잔학무도한 가해자들' 이 또 어떤 가해를 저지를지 모르니, [[권력]]을 잡았을 때 최대한 우리의 의지를 관철시키자는 '''한탕주의적 마인드'''가 나타난다. 이런 문제들로 인하여, 그 결과 현대 진보진영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대의 아래에서 모든 비판이 면책되는 정치적 "안전 공간" 을 형성'''하고, 약자들은 언제나 진실하며 선하다는 '''[[언더도그마]]를 절대화하고 말았다.''' 저자가 보기에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진보세력에게 피해자성은 곧 훈장과도 같은 것이고, 과거와 같았던 약자들의 단결이나 사회적 책임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게 되었으며, 고상한 도덕적 대의가 있는 이상 그 담론은 견제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즉, 진보측은 현재의 PC 담론이 "정치를 가장한 탈정치이고, 현학을 가장한 [[반지성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p.11).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의 금지와 오류의 묵인, [[워마드]] 등을 제지하지 않는 이유 등은 전부 그 사례 내지는 징후에 불과하다. 문제는 현대사회가 극우 선동가들이 판을 치는 시대라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으로 무장한 진보진영은 '''[[극우]] 선동가들과 "적대적 공생" 을 한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도널드 트럼프]]일 것인데, 트럼프의 정책과 행보가 대중의 지지를 얻을 때 리버럴들은 대중을 '계몽' 하면 될 일이라고 간단히 치부했다. 하지만 이것은 대중에게는 '''가식적인 [[위선자]]'''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트럼프의 [[극우]] [[포퓰리즘]]의 인기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한 사람은, 저자가 보기에는 [[버니 샌더스]]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PC에 지쳤다" 면서 정치적 올바름의 한계를 정확히 읽어냈다는 것. 유권자들이 보기에 트럼프는 부도덕한 막말꾼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성 있는 [[위악자]]'''처럼 느껴지게 되었으며, 이는 그 대척점에 진보진영이 자청해서 자리해 주었기에 가능했다. 진보진영의 운동가들도 트럼프 같은 "올바르지 못한" 선동가가 필요하고, 트럼프 같은 선동가들도 PC운동가들 덕택에 인기를 누린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적대적 공생의 실체다. 그렇다면 이제 어찌할 것인가? 우선, 저자는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한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 첫 걸음으로서, 오늘날 폭주하고 있는 [[메갈리아]]나 [[워마드]] 같은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비판할 것은 가감없이 비판해야 한다는 것. 다음으로, 저자는 [[정체성 정치]] 역시 미련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기존의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하여, 저자는 그런 것보다는 오히려 부의 재분배와 같이 계급적 이익에 기반한 정책이 더 호소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장기적으로는, 마침내 진보정당들이 그 계급적 기반의 한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대중정당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시한다. 특정 계급이나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만이 지지하는 정당이 아닌, (극소수 지배자들을 제외한) 모든 대중과 시민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비전과 정책들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